드라마를 보다가 제 이야기 같아서 잠깐 멈췄습니다. 시리아 난민 출신 의사 바시르가 뛰어난 실력을 갖추고도 서류 한 장 없다는 이유로 매 순간 정체를 의심받는 장면에서, 저도 비슷한 감각을 느낀 적이 있다는 걸 떠올렸습니다. 능력과 자격 사이의 간격이 이렇게까지 클 수 있다는 것, 드라마 는 그 문제를 정면으로 건드립니다.자격증명 없는 의사, 실력만으로 살아남을 수 있을까제가 직접 여러 분야를 옮겨 다니며 일해봤는데, 새로운 곳에 들어갈 때마다 가장 먼저 요구받는 건 경험 자체가 아니라 그 경험을 증명하는 서류였습니다. 분명히 쌓아온 것들이 있는데, 공식적인 형태로 포장되어 있지 않으면 없는 것으로 취급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바시르의 상황은 그 감각을 극단까지 밀어붙입니다.바시르는 시리아 내전을 현장에..
새로운 걸 배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제일 먼저 하는 계산이 있습니다. 시간이 아니라 돈입니다. 수강료, 교재비, 그 기간 동안 줄어들 수입. 그러다 보면 결국 하고 싶은 일보다 당장 안정적인 선택을 하게 됩니다. 영화 을 보면서 그 계산이 다시 떠올랐습니다. 자원이 없어서 생긴 불평등이 아니라, 누군가 의도적으로 설계한 경계 때문에 치료조차 받지 못하는 세계. 그 장면들이 생각보다 훨씬 오래 머물렀습니다.의료불평등: 자원 부족이 아니라 의도된 설계영화 속 엘리시움에는 어떤 질병이든 수초 만에 치료할 수 있는 메디-포드(Med-Pod)가 존재합니다. 여기서 메디-포드란 신체 이상을 즉각 스캔하고 세포 단위로 복구하는 의료 장비로, 영화 안에서는 부유층 가정에 냉장고처럼 한 대씩 비치되어 있습니다. ..
재난이 오면 사회가 더 평등해질 거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저도 그렇게 막연히 믿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1~3화를 보고 나서, 그 생각이 제법 단단하게 흔들렸습니다.지구상의 모든 남성이 1초 만에 사라졌는데, 사회는 평화로워지기는커녕 교통과 산업과 정부가 연쇄적으로 무너집니다. 그리고 그 폐허 위에서 권력을 누가 쥘 것인지를 두고 다툼이 벌어집니다. 제가 직접 보면서 느낀 건, 이게 단순한 SF가 아니라는 점이었습니다.사회 시스템은 생각보다 훨씬 불균형했다작품 초반, 모든 남성이 사망하는 순간 비행 중인 항공기들이 추락합니다. 조종석에 앉은 사람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교통망이 끊기고, 물류가 멈추고, 군사 시스템이 마비됩니다. 이 장면을 보면서 저는 직장에서 겪었던 일이 떠올랐습니다.함께 일하..
선한 의지를 가진 사람이 조직에 들어가면 결국 뭔가를 바꿀 수 있을 거라고 막연히 믿었습니다. 넷플릭스 멕시코 오리지널 은 그 믿음을 첫 화부터 조금씩 무너뜨렸습니다. 평범한 삶을 살던 아나 마리아가 거대한 데킬라 기업의 후계자로 지목되면서 맞닥뜨리는 것은 기회가 아니라 이미 썩을 대로 썩은 구조였고, 저는 그 모습에서 제 경험을 꽤 많이 떠올렸습니다.권력 승계, 권한은 없고 책임만 있다일반적으로 후계자 지명은 기회이자 영광으로 그려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제가 직접 비슷한 상황을 겪어보니, 실상은 전혀 달랐습니다. 아나 마리아가 전세기로 멕시코에 호출되어 아버지 파우스토 카란사로부터 모나르카 그룹의 차기 회장으로 지목되는 장면은, 겉으로는 극적인 신뢰처럼 보이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당혹감 그 자체입..
업무를 넘겨받는데 인수인계 자료가 거의 없었던 적이 있습니다. 전임자가 급하게 떠났고, 뭘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는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죠. 영화 을 보다가 그 기억이 불쑥 떠올랐습니다. 기억을 잃은 채 동면에서 깨어나 고장 난 우주선과 6만 명의 생명을 혼자 떠안아야 하는 주인공 바우어의 표정이, 그날 제 표정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정보 없는 책임, 그 막막함에 대하여영화는 주인공 바우어가 동면 캡슐에서 깨어나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그런데 그에게는 기억이 없습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이 우주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동료들은 어디에 있는지 아무것도 알지 못합니다. 의학적으로 이 상태를 역행성 기억상실(retrograde amnesia)이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역행성 기억상실이란, 특..
여덟 명이 저택에 모여 서로를 희생시키는 게임을 벌인다. 영화 를 보고 든 첫 생각은 "나라면 거절했을 텐데"였습니다. 그런데 막상 영화를 다 보고 나서는 그 자신감이 조용히 사라졌습니다. 절박함 앞에서 인간이 얼마나 쉽게 무너지는지를, 저도 살면서 조금은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강요된 선택 — 그게 정말 선택이었을까아이리스는 백혈병을 앓는 동생의 병원비와 부모님이 남긴 빚을 혼자 감당하며 살아가던 인물입니다. 셰퍼드 램브리라는 재단 이사장이 그녀에게 만찬 게임을 제안할 때, 아이리스는 그게 위험한 일이라는 걸 짐작했을 겁니다. 그럼에도 게임장으로 향한 것을 두고 "스스로 선택했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저도 비슷한 감각을 직접 겪어본 적이 있습니다. 경제적으로 빠듯한 시기에 조건이 마음에 들지 않는 일..
외계인이 나오는 영화라고 해서 거대한 우주 전쟁이나 첨단 기술 경쟁을 기대했는데, 실제로 제가 스크린 앞에서 눈물을 훔친 장면은 노인 셋이 외계인 옆에 조용히 앉아 제각각의 외로움을 털어놓는 순간이었습니다. 영화 는 SF적 설정을 빌린 노년 고독과 경청의 이야기였고, 그 메시지가 생각보다 훨씬 깊이 남았습니다.말 한마디 없어도 위로가 되는 이유 — 경청의 힘제가 직접 경험해 봤는데, 힘든 일이 있을 때 가장 상처가 됐던 건 차가운 침묵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상대가 제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곧바로 해결책을 꺼내 들거나, "그건 네 생각이 좀 잘못된 거야"라는 식으로 판단을 내릴 때였습니다. 말은 다 끝났는데 마음속엔 아무것도 풀리지 않은 채 오히려 더 닫히는 느낌. 그 경험이 이 영화를 보는 내내 떠올..
퇴근하고 나서도 머릿속에서 일이 떠나지 않았던 적이 있습니다. 마감을 넘긴 프로젝트, 원인을 못 찾은 오류 하나가 이불 속에서도 계속 맴돌았습니다. 그 감각이 정확히 겹치는 드라마를 봤습니다. 스웨덴 실화를 바탕으로 한 는 16년 동안 미제 사건을 놓지 못한 형사의 이야기인데, 보는 내내 "이 사람은 과연 어디까지 버텨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습니다.16년째 풀리지 않는 사건, 형사 요아킴의 시작2004년 스웨덴 린셰핑에서 실제로 발생한 사건을 다룬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 드라마를 보는 내내 다른 무게감이 느껴졌습니다. 범인은 피해자를 무작위로 선택했을 가능성이 높았고, 현장에서 확보한 단서는 극히 제한적이었습니다. 흉기에서 채취한 혈흔으로 DNA를 확보했지만 일치하는 인물이 없었습니다...
결혼식 네 번을 거치면서도 두 사람은 끝내 제때 마음을 말하지 못합니다. 1994년에 개봉한 은 영국 로맨틱 코미디의 고전으로 꼽히는데, 저는 이 영화를 보면서 마음이 있어도 타이밍을 놓쳐 흐지부지됐던 제 경험이 떠올라 꽤 오래 화면을 멍하니 바라봤습니다. 사랑에서 표현의 용기가 왜 중요한지, 그리고 결혼이 사랑의 유일한 증명인지를 이 영화는 제법 솔직하게 묻습니다.엇갈림 — 타이밍을 계속 놓치는 두 사람찰스와 캐리는 첫 번째 결혼식에서 만납니다. 연회가 끝나고 찰스가 뒤늦게 그녀를 따라가 즐거운 대화를 나누지만, 캐리는 곧 미국으로 돌아갑니다. 두 번째 결혼식에서 재회했을 때 캐리 곁에는 이미 약혼자가 있었고, 찰스는 감정을 꺼낼 틈도 없이 상황에 밀려납니다.저는 이 전개가 처음에는 답답하게 느껴졌습니..
열심히 일한 사람이 항상 인정받는다고 믿으셨습니까?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를 보고 나서 그 믿음이 꽤 흔들렸습니다. 경찰과 범죄 조직에 동시에 숨어든 두 첩자의 이야기인데, 저는 이 영화가 단순한 범죄 스릴러가 아니라 조직 안에서 자신을 숨기고 살아가는 일이 어떤 대가를 치르는지를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두 스파이가 서로를 쫓는 아이러니한 구조이 영화의 핵심 설정은 언더커버(undercover) 작전입니다. 여기서 언더커버란 수사관이 신분을 숨긴 채 범죄 조직에 직접 침투하는 위장 수사 방식을 의미합니다. 빌리 코스티건은 경찰이지만 범죄 조직에 잠입하고, 콜린 설리반은 프랭크 코스텔로 조직의 첩자이지만 경찰청 안에서 출세 가도를 달립니다. 두 사람이 서로의 정체를 찾아 쫓는 구조가 영화 전체를 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