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무를 넘겨받는데 인수인계 자료가 거의 없었던 적이 있습니다. 전임자가 급하게 떠났고, 뭘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는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죠. 영화 을 보다가 그 기억이 불쑥 떠올랐습니다. 기억을 잃은 채 동면에서 깨어나 고장 난 우주선과 6만 명의 생명을 혼자 떠안아야 하는 주인공 바우어의 표정이, 그날 제 표정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정보 없는 책임, 그 막막함에 대하여영화는 주인공 바우어가 동면 캡슐에서 깨어나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그런데 그에게는 기억이 없습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이 우주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동료들은 어디에 있는지 아무것도 알지 못합니다. 의학적으로 이 상태를 역행성 기억상실(retrograde amnesia)이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역행성 기억상실이란, 특..
저는 수학 천재 이야기라면 으레 '고독한 천재가 결국 세상을 이긴다'는 식일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은 달랐습니다. 국제 수학 올림피아드(IMO)라는 치열한 무대 위에서, 한 소년이 처음으로 사람의 마음 앞에 무릎을 꿇는 이야기였으니까요. 실화를 바탕으로 한 2014년작이라는 사실이 더 깊이 마음에 남았습니다.자폐 스펙트럼 소년이 숫자로 세상을 읽는 방식처음 새 학교에 들어갔을 때, 저는 그 특유의 어색함을 어떻게 풀어야 할지 몰라서 그냥 책상 앞에만 앉아 있었습니다. 속으로는 친해지고 싶은데 말이 먼저 나오지 않더군요. 그 기억 때문에 네이든을 보는 내내 남 얘기처럼 느껴지지 않았습니다.네이든은 자폐 스펙트럼 장애(ASD)를 가진 소년입니다. 여기서 자폐 스펙트럼 장애란, 사회적 소통과 상호작용에..
까칠하고 고집스러운 노인이 주인공인 영화가 이렇게 오래 마음에 남을 줄은 몰랐습니다. 는 표면만 보면 투덜이 노인의 변화를 그린 가벼운 드라마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상실감과 고립, 그리고 공동체가 사람을 어떻게 살게 하는지를 꽤 묵직하게 담아낸 작품이었습니다. 처음엔 오토가 그냥 피곤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보다 보니 제 안에서도 비슷한 감정을 발견했습니다.까칠함의 정체 — 상실감이 만든 방어기제오토가 쓰레기 분리수거를 제대로 안 하는 이웃에게 벌컥 화를 낸다거나, 주차 구역을 조금만 침범해도 따지고 드는 장면을 보면서 처음엔 솔직히 피곤하다고 느꼈습니다. 그런데 이런 반응이 단순히 성격 탓이 아니라 심리학에서 말하는 '방어기제(defense mechanism)'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방어기..
영화 을 틀었을 때 그냥 가볍게 볼 범죄물이라 생각했는데, 보고 나서 한참 멍하니 있었습니다. 갑자기 큰돈이 생겼을 때 기쁨과 불안이 동시에 밀려오는 그 감각이 제 기억을 건드렸기 때문입니다. 식당 종업원 케이티와 실직 상태의 연인 애덤이 재벌 노인의 유산을 떠안게 되면서, 행운이 어떻게 두 사람 사이를 갉아먹는지를 끝까지 긴장감 있게 보여줍니다.행운의 역설 — 준비 없이 찾아온 돈의 무게제가 직접 겪어봤는데, 예상치 못한 수입이 생겼을 때 가장 먼저 드는 감정은 기쁨이 아니라 묘한 불안입니다. '이게 진짜 내 것이 맞나?'라는 생각이 꼬리를 뭅니다. 영화 속 케이티와 애덤도 정확히 그 자리에 서 있습니다.두 사람은 강도 사건 이후 각자 어렵게 살아갑니다. 케이티는 재벌 레너드의 간병인으로 일하고, 애덤..
영화 에서 무명 작가 에디는 알약 하나로 뇌 사용률을 100% 끌어올려 하룻밤 만에 원고를 완성하고 금융계까지 장악합니다. 처음 이 장면을 봤을 때 저는 솔직히 "저도 저런 거 한 알만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마음이 드는 순간, 제 안에도 에디와 똑같은 욕망이 있다는 걸 느꼈습니다.NZT 한 알이 바꾼 삶, 그 시원함의 정체에디가 처음 NZT를 삼킨 순간, 화면이 달라집니다. 무의식 속에 쌓아둔 정보들이 선명하게 연결되고, 무기력했던 손이 원고를 써 내려가기 시작합니다. 하룻밤 사이에 수백 페이지 분량의 원고가 완성되고, 출판사가 먼저 연락해 옵니다.여기서 NZT는 영화 속 가상의 인지 강화 약물(cognitive enhancer)입니다. 인지 강화제란 기억력, 집중력, 정..
주변 분위기가 한쪽으로 쏠릴 때, 혼자 다른 생각을 꺼내기가 왜 이렇게 어려울까요. 영화 를 보다가 그 감각이 불쑥 떠올랐습니다. 눈빛 하나로 사람의 의지를 꺾어버리는 초인과, 그 어떤 압박에도 자기 기준을 잃지 않는 규남. 두 사람의 대결이 단순한 능력 싸움이 아니라 인간의 선택과 상처에 관한 이야기로 읽혔습니다.조종 능력이 통하지 않는 사람 — 초인과 규남의 설정영화에서 초인은 정신 지배(mind control) 능력을 가진 인물입니다. 여기서 정신 지배란 상대방의 의지를 빼앗아 자신이 원하는 행동을 강제로 하게 만드는 능력을 말합니다. 초인은 눈빛 하나로 주변 사람을 조종해 돈을 빼앗고 위기를 모면하는데, 이 능력이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trauma)에서 비롯됐다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트라우마란 강..
솔직히 저는 오랫동안 '다들 이렇게 사는데 내가 예민한 거겠지'라는 말로 제 불편함을 덮어왔습니다. 영화 《트루먼 쇼》를 다시 보다가 그 문장이 얼마나 위험한지 새삼 깨달았습니다. 씨헤븐이라는 거대한 세트장에서 30년을 살아온 트루먼의 이야기는, 생각보다 훨씬 제 이야기와 가까이 붙어 있었습니다.씨헤븐이라는 감옥 — 완벽한 통제의 구조《트루먼 쇼》의 세계관은 생각할수록 섬뜩합니다. 트루먼이 사는 씨헤븐(Seahaven)은 달에서도 보인다고 묘사될 만큼 거대한 세트장입니다. 총괄 책임자 크리스토프(Christof)는 날씨부터 인간관계, 심지어 트루먼의 공포증까지 연출했고, 이 모든 장면은 30년간 전 세계에 생중계됐습니다.여기서 핵심 개념 하나를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영화가 비판하는 건 단순한 몰래카메라..
솔직히 그냥 잔잔한 음식 영화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혜원이 눈 덮인 밭에서 배추를 꺼내 된장국을 끓이는 장면에서, 제가 가장 지쳐 있던 때의 기억이 갑자기 치고 올라왔습니다. 영화 《리틀 포레스트》는 서울 생활에 지친 혜원이 고향으로 돌아와 사계절을 보내며 자신의 속도를 찾아가는 이야기입니다. 이 글은 그 영화를 보며 제가 직접 느낀 것들을 풀어낸 기록입니다.치유가 시작되는 곳 — 배고픔이라는 솔직한 이유저도 처음엔 이 영화의 시작이 너무 단순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취업도 실패하고 남자친구와도 헤어진 혜원이 고향으로 돌아온 이유가 고작 "배가 고파서"라는 거잖아요. 그런데 보면 볼수록 그게 가장 인간적인 이유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혜원은 눈 속에 묻힌 배추를 꺼내 된장국을 끓입니다. 얼큰한 수제비국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