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넷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유일한 목격자인 소녀의 말을 아무도 믿지 않았습니다. 영화 《가려진 시간》을 처음 봤을 때, 제가 가장 먼저 느낀 건 공포가 아니라 그 답답함이었습니다. 내가 직접 본 일을 말해도 믿어주지 않을 때의 그 감각, 생각보다 오래 남는 영화입니다.외로움이 만들어낸 연결 — 수린과 성민의 첫 만남낯선 섬으로 이사 온 소녀 수린은 새아빠와도, 동네 아이들과도 접점이 없습니다. 새아빠는 화노도 재개발 터널 공사의 책임자로 현장을 뛰어다니느라 수린에게 눈길 한 번 제대로 줄 여유가 없고, 수린은 엄마를 잃은 슬픔을 어디에도 꺼내놓지 못한 채 하루하루를 버팁니다.그런 수린 앞에 같은 또래 소년 성민이 나타납니다. 둘의 첫 접점은 풀린 신발 끈이었는데, 제가 이 장면에서 피식 웃었습니다..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픽사 애니메이션이 "꿈을 이뤄도 허전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할 줄은 몰랐거든요. 재즈 뮤지션 조 가드너가 평생 원하던 무대에 오른 직후 느끼는 공허함은, 제가 콘텐츠 작업에서 목표 조회수를 달성하고도 곧바로 다음 숫자를 걱정했던 그 기분과 너무 닮아 있었습니다. 이 영화가 단순한 감동 애니메이션이 아닌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목표 집착이 만드는 함정 — 조 가드너의 공허함이 낯설지 않은 이유영화 《소울》의 핵심 구조는 생각보다 정밀합니다. 주인공 조는 재즈 공연 직전 맨홀에 빠져 사후세계인 '저 세상'에 도달하고, 그곳에서 영혼들이 성격과 목표를 부여받는 '유 세미나(You Seminar)'로 떨어집니다. 여기서 유 세미나란, 태어나기 전 영혼들이 지구로 떠나기 위..
영화 《비긴 어게인》에서 그레타와 댄은 스튜디오 계약 없이, 예산 없이, 뉴욕 거리와 지하철역과 옥상에서 앨범 한 장을 완성합니다. 제가 처음 이 장면들을 봤을 때 솔직히 "저게 되나?" 싶었는데, 끝나고 나서는 그게 이 영화에서 가장 설득력 있는 장면이었다고 생각을 바꿨습니다.야외 녹음이 말하는 것: 조건이 아니라 태도영화 속 댄 멀리건은 과거 그래미 수상 경력이 있는 프로듀서입니다. 그가 회사에서 해고되고, 아내와 딸과의 관계까지 무너진 채 술집에서 시간을 보내다 그레타의 노래를 듣는 장면은 꽤 강렬합니다. 주변이 소음으로 가득한데도 그의 귀에는 상상의 피아노, 드럼, 첼로가 들리기 시작하죠. 이걸 영화에서는 프로듀서의 귀, 즉 사운드 디자인(Sound Design) 감각으로 묘사합니다. 여기서 사운..
차별을 경험한 사람이 다른 누군가를 편견으로 바라볼 수 있다는 사실, 저는 《주토피아》를 보면서 처음으로 제대로 직면했습니다. 토끼 출신 경찰관 주디 홉스가 수석 졸업 후 주토피아 도심으로 발령받는 이야기는, 새 직장에서 단순 업무부터 시작해야 했던 제 첫 출근 기억과 너무 비슷해서 영화 내내 마음이 편하지 않았습니다.편견 — 차별을 겪은 주디도 자유롭지 못했다주디 홉스는 토끼라는 이유만으로 경찰이 될 수 없다는 말을 수없이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수석 졸업이라는 성취로 그 편견을 정면으로 깼지요. 그런데 정작 배치를 받고 나서 맡은 일은 주차 단속이었습니다. 제가 직접 겪어봤는데, 새 직장 첫날 "이게 제 역할이 맞나?" 싶을 때 오는 무력감은 생각보다 훨씬 깊습니다. 주디가 실망하면서도 자신만의 목표를..
솔직히 저는 오랫동안 '다들 이렇게 사는데 내가 예민한 거겠지'라는 말로 제 불편함을 덮어왔습니다. 영화 《트루먼 쇼》를 다시 보다가 그 문장이 얼마나 위험한지 새삼 깨달았습니다. 씨헤븐이라는 거대한 세트장에서 30년을 살아온 트루먼의 이야기는, 생각보다 훨씬 제 이야기와 가까이 붙어 있었습니다.씨헤븐이라는 감옥 — 완벽한 통제의 구조《트루먼 쇼》의 세계관은 생각할수록 섬뜩합니다. 트루먼이 사는 씨헤븐(Seahaven)은 달에서도 보인다고 묘사될 만큼 거대한 세트장입니다. 총괄 책임자 크리스토프(Christof)는 날씨부터 인간관계, 심지어 트루먼의 공포증까지 연출했고, 이 모든 장면은 30년간 전 세계에 생중계됐습니다.여기서 핵심 개념 하나를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영화가 비판하는 건 단순한 몰래카메라..
솔직히 저는 오랫동안 가족의 사랑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습니다. 할머니가 무엇을 챙겨주셔도 고맙다는 말 한마디 제대로 못 했던 기억이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영화 《집으로…》를 보면서 그 기억이 불쑥 올라왔고, 이 영화가 단순한 성장 영화가 아니라는 걸 뒤늦게 깨달았습니다.서툰 사랑이 실제로 어떻게 전달되는가일반적으로 영화 속 갈등은 오해에서 비롯된다고 알려져 있지만, 제가 직접 이 영화를 보면서 느낀 건 조금 달랐습니다. 상우와 할머니 사이의 갈등은 오해라기보다 언어와 세대 사이의 간극, 즉 세대 간 소통 단절(intergenerational communication gap)에 더 가까웠습니다. 여기서 세대 간 소통 단절이란 서로 다른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이 같은 감정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표현할 때..
영화 《형》은 사기죄로 수감됐다가 가석방된 이복형 고두식이 시각장애인이 된 동생 고두영의 집에 들어오면서 벌어지는 이야기입니다. 처음에는 동생의 상황을 자신의 이익에 이용하는 뻔뻔한 형의 모습으로 시작하는데, 저는 이 설정을 보면서 솔직히 좀 불편했습니다. 그런데 영화가 후반부로 갈수록, 제가 동생과 함께 살며 느꼈던 그 투박한 책임감이 고스란히 스크린에 담겨 있다는 걸 알아버렸습니다.두식의 변화, 그냥 감동 코드가 아니었습니다두식이 처음 두영의 집을 찾아온 건 선의가 아니었습니다. 가석방 심사에서 "눈먼 동생을 돌봐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형기를 면하려는 계산된 행동이었죠. 이른바 심리학에서 말하는 도구적 친밀감(Instrumental Intimacy), 즉 관계 자체보다 관계에서 얻을 이익을 목적으..
2019년 개봉한 《극한직업》은 누적 관객 수 1,626만 명을 기록하며 한국 영화 역대 흥행 2위에 오른 작품입니다. 처음 이 수치를 접했을 때 저도 반신반의했습니다. 범인을 잡으러 치킨집을 인수한다는 설정이 이렇게까지 많은 사람의 공감을 얻을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으니까요.정체성 혼란 — 형사인지 치킨집 사장인지 모르겠는 그 감각마약반 형사들이 거물급 마약사범 이무배를 잡기 위해 그의 조직원들이 드나드는 건물 앞 치킨집을 인수하면서 이야기는 본격적으로 달아오릅니다. 원래 목적은 잠복 수사, 즉 위장신분(cover identity)이었습니다. 여기서 위장신분이란 수사관이 본래 신분을 숨기고 민간인으로 행세하며 범죄 조직에 접근하는 수사 기법을 말하는데, 문제는 가게가 너무 잘됐다는 겁니다.마 형사의 숨..
우연과 승희는 10년 가까이 서로를 좋아하면서도 단 한 번도 같은 시간에 같은 자리에 있지 못했습니다. 영화 《너의 결혼식》을 보고 나서 저도 한동안 멍했습니다. 감정의 크기가 아니라 타이밍과 준비의 문제라는 걸, 제 경험을 통해서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엇갈린 타이밍 — 좋아하는 마음만으로는 부족했던 이유영화는 고등학교 교실에서 시작됩니다. 매일 싸움에 휘말리던 우연 앞에 전주에서 강릉으로 전학 온 승희가 나타나고, 둘은 어색한 첫 만남을 거쳐 포장마차 밥 한 끼로 가까워집니다. 승희가 학교 일진 태끼에게 시달리자 우연은 맞아주는 방식으로 그녀를 지키고, 야간 자율학습 시간에 좋아하는 노래를 불러주며 MP3를 선물합니다. 승희는 말 대신 우연의 손등에 그림을 그려 마음을 전하고, 두 사람은 첫 ..
솔직히 그냥 잔잔한 음식 영화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혜원이 눈 덮인 밭에서 배추를 꺼내 된장국을 끓이는 장면에서, 제가 가장 지쳐 있던 때의 기억이 갑자기 치고 올라왔습니다. 영화 《리틀 포레스트》는 서울 생활에 지친 혜원이 고향으로 돌아와 사계절을 보내며 자신의 속도를 찾아가는 이야기입니다. 이 글은 그 영화를 보며 제가 직접 느낀 것들을 풀어낸 기록입니다.치유가 시작되는 곳 — 배고픔이라는 솔직한 이유저도 처음엔 이 영화의 시작이 너무 단순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취업도 실패하고 남자친구와도 헤어진 혜원이 고향으로 돌아온 이유가 고작 "배가 고파서"라는 거잖아요. 그런데 보면 볼수록 그게 가장 인간적인 이유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혜원은 눈 속에 묻힌 배추를 꺼내 된장국을 끓입니다. 얼큰한 수제비국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