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무를 넘겨받는데 인수인계 자료가 거의 없었던 적이 있습니다. 전임자가 급하게 떠났고, 뭘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는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죠. 영화 을 보다가 그 기억이 불쑥 떠올랐습니다. 기억을 잃은 채 동면에서 깨어나 고장 난 우주선과 6만 명의 생명을 혼자 떠안아야 하는 주인공 바우어의 표정이, 그날 제 표정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정보 없는 책임, 그 막막함에 대하여영화는 주인공 바우어가 동면 캡슐에서 깨어나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그런데 그에게는 기억이 없습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이 우주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동료들은 어디에 있는지 아무것도 알지 못합니다. 의학적으로 이 상태를 역행성 기억상실(retrograde amnesia)이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역행성 기억상실이란, 특..
를 보기 전까지, 1997년 IMF 외환위기가 개인의 삶을 얼마나 근본적으로 바꿔놓는지 피부로 실감하지 못했습니다. 가족 전체가 삶의 터전을 잃고 콜롬비아 보고타로 떠나야 했던 이야기는, 낯선 환경에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던 제 경험과 겹치며 생각보다 훨씬 깊이 와닿았습니다. 이 영화가 단순한 범죄 스릴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건, 다 보고 나서 한참 뒤였습니다.낯선 환경에서 눈치로 배우는 것들새로운 곳에 처음 발을 딛는 게 어떤 느낌인지, 저는 꽤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새 직장에 들어갔을 때 업무 매뉴얼보다 먼저 파악해야 했던 건, 누가 진짜 힘을 가진 사람인 지였습니다. 겉으로 친절하게 조언을 건네는 사람이 실은 자기 이익을 챙기는 경우도 있었고, 말투가 다소 차갑게 느껴지는 사람에게서..
재난 앞에서 사람은 선해질까요, 아니면 더 잔인해질까요.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를 보면서 저는 이 질문이 사실 틀렸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선악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구조 안에 놓이느냐의 문제였습니다. 유일하게 살아남은 황궁 아파트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일들이 낯설지 않게 느껴진 건, 저도 비슷한 집단 논리를 직접 경험해봤기 때문이었습니다.기여도 분배 원칙, 합리적인가 가혹한가황궁 아파트 주민들이 외부인을 내보낸 뒤 가장 먼저 한 일은 내부 질서를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그 핵심이 바로 '기여도 분배' 원칙입니다. 기여도 분배란 공동체에 기여한 만큼 자원을 나눠 받는 시스템으로, 쉽게 말해 일한 만큼 먹는 구조입니다. 처음 들었을 때 저도 꽤 합리적이라고 느꼈습니다.그런데 잠깐 생각해 보면 균열이 보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