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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난 앞에서 사람은 선해질까요, 아니면 더 잔인해질까요.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를 보면서 저는 이 질문이 사실 틀렸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선악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구조 안에 놓이느냐의 문제였습니다. 유일하게 살아남은 황궁 아파트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일들이 낯설지 않게 느껴진 건, 저도 비슷한 집단 논리를 직접 경험해봤기 때문이었습니다.
기여도 분배 원칙, 합리적인가 가혹한가
황궁 아파트 주민들이 외부인을 내보낸 뒤 가장 먼저 한 일은 내부 질서를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그 핵심이 바로 '기여도 분배' 원칙입니다. 기여도 분배란 공동체에 기여한 만큼 자원을 나눠 받는 시스템으로, 쉽게 말해 일한 만큼 먹는 구조입니다. 처음 들었을 때 저도 꽤 합리적이라고 느꼈습니다.
그런데 잠깐 생각해 보면 균열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몸이 아픈 사람, 어린아이, 노인은 기여 자체가 어렵습니다. 기여를 측정하는 기준은 누가 정합니까. 결국 힘을 가진 사람이 기준을 쥐게 되고, 그 기준은 자연히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기울기 마련입니다. 영화 속에서 군필자로 구성된 방범대가 핵심 권력을 쥔 것도 그 연장선이었습니다.
제가 직접 겪어봤는데, 새로운 집단에 들어갔을 때 이 구조가 생각보다 빨리 작동합니다. 학교나 직장에서도 경력이 없거나 아직 성과를 내지 못한 사람은 발언권이 줄어들고, 맡은 일 이상으로 책임을 지지 않으면 '쓸모없는 사람'으로 여겨질까 봐 불안해집니다. 저 역시 그 불안을 느낀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황궁 아파트의 원칙이 단순히 영화 속 설정처럼 보이지 않았습니다.
사회심리학에서는 이런 현상을 '내집단 편애(in-group favoritism)'라고 설명합니다. 내집단 편애란 자신이 속한 집단의 구성원에게는 더 많은 자원과 신뢰를 배분하고, 외집단은 무의식적으로 배제하려는 심리적 경향을 말합니다. 실험 연구들에 따르면 이 경향은 집단의 생존 자원이 부족해질수록 훨씬 강하게 발현됩니다(출처: 미국심리학회(APA)). 황궁 아파트 주민들의 외부인 퇴출 결정은 개인의 잔인함이 아니라, 이 내집단 편애 심리가 극단까지 밀린 결과였습니다.
그러나 생존을 명분으로 사람의 가치를 기여도 수치로만 환산하는 순간, 공동체는 안전한 피난처가 아니라 또 다른 위계 구조로 변합니다. 황궁 아파트가 정확히 그 경로를 밟았습니다. 합리적으로 시작된 원칙이 어느 순간 약자를 밀어내는 도구가 된 것입니다.
- 기여도 분배: 기여한 만큼 자원을 받는 원칙. 공정해 보이지만 기여 기준을 쥔 자가 권력을 갖는다.
- 내집단 편애: 자원이 부족할수록 외집단을 배제하려는 심리가 강해진다.
- 방범대 중심의 권력 집중: 물리적 기여가 가능한 군필자 집단이 발언권과 자원을 독점하게 된다.
- 기여 불능자(노인, 아이, 환자)는 원칙적으로 배제 대상이 된다는 구조적 모순이 존재한다.
집단 논리가 침묵을 만들고, 침묵이 폭력을 만든다
영화에서 제가 가장 불편하게 느낀 장면은 잔인한 폭력 장면이 아니었습니다. 주민 투표로 외부인 퇴출이 결정될 때, 다수가 같은 방향으로 손을 들던 그 장면이었습니다. 이게 불편했던 이유는 그 안에 저 자신이 있을 수 있다는 걸 알았기 때문입니다.
집단 논리, 정확하게는 '집단사고(groupthink)'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집단사고란 구성원들이 집단의 화합을 유지하기 위해 이견을 스스로 억누르고, 비판 없이 다수의 결정을 따르게 되는 심리 현상을 말합니다. 사회심리학자 어빙 재니스(Irving Janis)가 이를 체계화했으며, 집단사고가 강할수록 비윤리적 결정조차 정상화되는 경향이 있다고 분석했습니다(출처: Encyclopaedia Britannica).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황궁 아파트 주민들이 특별히 나쁜 사람들이어서 그런 결정을 내린 게 아니라, 집단 안에서 이견을 꺼내는 비용이 너무 높아졌기 때문이었습니다. 제 경험상 이건 좀 다릅니다. 실제로 주변 사람 전체가 같은 방향을 가리킬 때, 마음속으로 의문이 들어도 입을 여는 건 생각보다 훨씬 어렵습니다. '분위기를 깨는 사람'이 되는 게 두렵기 때문입니다. 그 침묵이 반복되면 부당한 방식조차 당연한 규칙처럼 자리를 잡게 됩니다.
영화 속 '영탁'의 반전은 이 집단 논리의 허약함을 가장 날카롭게 드러냅니다. '주민만이 살 수 있다'는 원칙을 가장 강하게 주장한 사람이 정작 진짜 주민이 아니었다는 사실. 제가 직접 이 장면을 보면서 느낀 건, 소속을 구분하는 기준이 얼마나 쉽게 조작될 수 있는지였습니다. 기준 자체가 처음부터 불완전했던 것입니다.
명화의 이타적 행동은 그 침묵 속에서 유일하게 다른 목소리를 낸 선택이었습니다. 제 경우엔 명화의 태도가 이상적으로만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인간성을 지키려는 의지는 분명히 의미가 있지만, 구체적인 생존 방법을 제시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한계도 있었습니다. 다만 그 한계가 명화를 틀린 사람으로 만들지는 않습니다. 옳은 말이 언제나 효율적인 방법과 일치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콘크리트 유토피아에서 외부인을 쫓아낸 주민들이 나쁜 건가요?
A. 단순히 나쁘다고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식량과 공간이 제한된 상황에서 내집단 편애 심리가 극단까지 밀린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생존을 명분으로 약탈과 폭력을 정당화하고 사람의 가치를 기여도로만 환산하기 시작한 순간, 공동체는 이미 또 다른 폭력의 공간이 됐습니다. 선악보다 어떤 구조가 그 선택을 만들었는지를 보는 게 더 정확합니다.
Q. 영탁이 가짜 주민이라는 반전이 영화에서 왜 중요한가요?
A. '주민만이 살 수 있다'는 원칙을 가장 강하게 집행한 인물이 사실 진짜 주민이 아니었다는 설정은, 집단의 소속 기준이 얼마나 불완전하고 쉽게 조작될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기준을 정하고 집행하는 권력이 그 기준 자체를 위반하고 있었다는 아이러니가 황궁 아파트 전체 시스템의 붕괴를 압축적으로 상징합니다.
Q. 집단사고(groupthink)가 일상에서도 실제로 작동하나요?
A. 네, 직장과 학교처럼 일상적인 집단에서도 충분히 작동합니다. 다수가 같은 방향을 가리킬 때 이견을 꺼내는 비용이 높아지고, 침묵이 반복되면 부당한 결정도 자연스러운 규칙처럼 굳어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사회심리학 연구들은 집단 자원이 부족하거나 외부 위협이 클수록 이 경향이 더 강해진다고 일관되게 보고하고 있습니다.
Q. 명화의 이타적인 태도는 현실적인 해결책이 될 수 있나요?
A. 인간성을 지키려는 선택이라는 점에서 의미는 분명합니다. 다만 영화 안에서 명화는 구체적인 생존 방법까지 충분히 제시하지 못했다는 한계가 있습니다. 이타주의(altruism)는 그 자체로 가치 있지만, 제한된 자원 상황에서는 신뢰와 원칙을 제도화하는 방식으로 뒷받침되지 않으면 지속되기 어렵습니다.
결론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누가 옳은지 판정하는 영화가 아닙니다. 제가 이 영화를 보고 나서 남은 질문은 하나였습니다. 어떤 환경과 제도가 평범한 사람을 이기적으로 행동하게 만드는가. 인간 본성을 탓하기 전에 그 본성이 작동하게 된 구조를 먼저 봐야 한다는 것, 이게 영화가 던진 진짜 질문이라고 봅니다.
진정으로 안전한 공동체는 높은 벽만으로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제 경험상 이건 영화 밖에서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약한 사람까지 지킬 수 있는 신뢰와 원칙이 있을 때, 그 집단은 비로소 유지됩니다. 이 영화를 아직 보지 않으셨다면, 재난 스릴러가 아니라 공동체와 인간 본성에 대한 질문을 들고 보시길 권합니다. 그 질문이 낯설지 않게 느껴지는 순간이 올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