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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난이 오면 사회가 더 평등해질 거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저도 그렇게 막연히 믿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Y: 더 라스트 맨> 1~3화를 보고 나서, 그 생각이 제법 단단하게 흔들렸습니다.
지구상의 모든 남성이 1초 만에 사라졌는데, 사회는 평화로워지기는커녕 교통과 산업과 정부가 연쇄적으로 무너집니다. 그리고 그 폐허 위에서 권력을 누가 쥘 것인지를 두고 다툼이 벌어집니다. 제가 직접 보면서 느낀 건, 이게 단순한 SF가 아니라는 점이었습니다.
사회 시스템은 생각보다 훨씬 불균형했다
작품 초반, 모든 남성이 사망하는 순간 비행 중인 항공기들이 추락합니다. 조종석에 앉은 사람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교통망이 끊기고, 물류가 멈추고, 군사 시스템이 마비됩니다. 이 장면을 보면서 저는 직장에서 겪었던 일이 떠올랐습니다.
함께 일하던 담당자가 갑자기 퇴사한 뒤, 충분한 인수인계 없이 그 사람의 업무가 고스란히 제게 넘어온 적이 있습니다. 평소엔 아무 문제 없이 돌아가는 것처럼 보였던 일들이 사실은 특정인의 경험과 암묵지(tacit knowledge)에 의존하고 있었다는 걸 그때 처음 실감했습니다. 여기서 암묵지란 문서화되지 않은 채 특정인의 경험 속에만 축적된 업무 지식을 뜻합니다. 매뉴얼에 없는 그 지식이 사라지자 시스템은 순식간에 흔들렸습니다.
작품 속 세계도 마찬가지입니다. 특정 성별이 오랫동안 특정 직군을 독점해온 결과, 그쪽 인력이 사라지자 사회 전체가 연쇄 붕괴를 경험합니다. 이걸 두고 "역시 남자가 필요하다"는 식으로 읽는 시각도 있는데, 저는 그보다 역할과 기술이 얼마나 편중되어 배분되어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성별의 우열이 아니라, 구조적 불균형의 민낯입니다.
실제로 성별 직종 분리(occupational gender segregation) 현상은 전 세계적으로 뚜렷하게 나타납니다. 여기서 성별 직종 분리란 특정 직종이 특정 성별에 집중되는 현상을 말하며, 이는 개인의 선택만이 아니라 사회적 구조와 교육의 결과이기도 합니다. 출처: ILO(국제노동기구)에 따르면 건설, 운송, 군사 분야의 남성 비율은 여전히 압도적으로 높습니다. 작품이 그 현실을 그대로 들고 온 셈입니다.
- 교통·물류·군사 등 특정 분야의 성별 편중이 사회 붕괴의 직접 원인으로 묘사됨
- 문서화되지 않은 암묵지가 사라지면서 시스템이 연쇄적으로 마비됨
- 성별 직종 분리는 현실에서도 통계로 확인되는 구조적 현상임
권력 승계 싸움은 재난 중에도 멈추지 않는다
대통령 사망 이후, 비서실장 제니퍼 브라운이 대통령직을 위임받습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이스라엘 무장 수용소에서 의식을 되찾은 레지나가 등장합니다. 미국 헌법상 승계 서열 3위인 그녀가 살아있다면 대통령직은 그녀에게 넘어가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됩니다. 재난이 한창인 상황에서도 정치 세력은 레지나 지지파와 제니퍼 지지파로 즉각 갈라섭니다.
이 장면이 저는 생각보다 훨씬 현실적으로 다가왔습니다.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대부분의 재난 서사에서는 위기가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촉매제로 작동하는데, 이 작품은 오히려 기존의 권력욕과 이념 대립이 재난 속에서 더 선명하게 드러난다는 방향을 택합니다.
헌법적 정통성(constitutional legitimacy), 쉽게 말해 법과 제도가 정한 절차에 따른 권력의 정당성이 생존보다 우선시되는 상황이 벌어지는 겁니다. 어떤 분들은 이런 전개가 비현실적이라고 느끼실 수도 있는데, 제 경험상 이건 오히려 현실에 더 가깝습니다. 조직이 위기에 처했을 때 내부 갈등이 사라지기보다는, 평소엔 눌려 있던 갈등이 수면 위로 올라오는 걸 여러 번 봤습니다.
유일하게 살아남은 Y 염색체 보유자 요릭의 존재를 둘러싼 통제권 다툼도 같은 맥락입니다. 그의 생존 원인을 밝히는 것보다, 그를 누가 통제하느냐가 더 급박한 정치 문제가 됩니다. 한 사람이 인류 재건의 열쇠가 될 수 있다는 상황에서, 그 사람 자신의 감정과 의사는 의제에서 밀려납니다.
영웅을 강요받은 사람의 이야기, 요릭의 성 역할
요릭은 인류 전체의 생존이 걸린 존재입니다. 그런데 그가 가장 먼저 하려는 일은 약혼녀 베스를 찾는 겁니다. 이걸 두고 "무책임하다"고 보는 시각도 있는데, 저는 조금 다르게 읽혔습니다.
갑자기 영웅이 되기를 요구받은 평범한 사람이 그 역할을 거부하거나 미루는 건, 어떻게 보면 가장 인간적인 반응입니다. 제 경우에도 주변에서 특정 역할을 기대하기 시작할수록, 제가 원하지 않았던 책임까지 당연하게 넘어오는 경험을 했습니다. 그때 느꼈던 부담과 요릭의 태도 사이에 묘하게 겹치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성 역할(gender role)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이는 사회가 특정 성별에게 기대하거나 부과하는 행동 양식과 책임의 집합을 뜻합니다. 작품은 이 개념을 뒤집어서 사용합니다. 여성만 남은 세계에서 여성들은 군인이 되고, 정치인이 되고, 생존을 책임집니다. 반대로 유일한 남성인 요릭은 보호받아야 할 존재, 통제되어야 할 자원으로 취급됩니다. 기존의 성 역할이 완전히 역전된 구조입니다.
출처: OECD 성 평등 지수(SIGI)가 보여주듯, 현실에서 성 역할은 여전히 직업 선택, 돌봄 부담, 사회적 기대에 깊숙이 영향을 미칩니다. 작품은 그 구조를 극단적인 방식으로 뒤집어 보여줌으로써, 우리가 평소에 얼마나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는지를 드러냅니다. 특수요원 355의 활동 방식이나, 대통령 제니퍼 브라운의 판단이 기존 서사에서 남성 캐릭터가 맡던 역할과 구조적으로 겹친다는 점도 그런 맥락에서 읽혔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Y: 더 라스트 맨은 어디서 볼 수 있나요?
A. 디즈니플러스(Disney+)에서 스트리밍 중입니다. 전 시즌이 공개되어 있어 한 번에 몰아보기 가능합니다. 다만 시즌 1 이후 제작이 중단된 미완결작이라는 점은 미리 알고 시작하는 게 좋습니다.
Q. 원작 만화와 드라마 버전은 많이 다른가요?
A. 기본 설정과 핵심 인물은 공유하지만, 드라마는 정치적 갈등과 권력 승계 구도를 더 깊이 다루는 방향으로 각색되었다고 보는 시각이 많습니다. 원작 팬들 사이에서는 호불호가 갈리는 편입니다. 저는 드라마를 먼저 봤는데, 원작을 모르는 상태에서도 충분히 몰입할 수 있었습니다.
Q. 처음 1~2화가 복잡하게 느껴지는데 계속 봐야 할까요?
A. 초반에 인물과 정치 세력이 한꺼번에 등장해 흐름이 다소 버겁게 느껴지는 건 사실입니다. 제 경험상 3화까지 보면 각 인물의 위치가 정리되면서 훨씬 수월해집니다. 빠른 전개보다 구조 파악에 집중하며 보면 도움이 됩니다.
Q. 페미니즘 드라마라고 봐도 되나요?
A. 그렇게 분류하는 분들도 있는데, 저는 그보다는 사회 구조와 권력에 대한 이야기에 더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여성이 주도하는 세계를 그리면서도, 그 세계 안에서 또다시 권력 다툼과 차별이 발생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특정 성별이 답이라는 결론보다는, 구조 자체를 들여다보게 만드는 작품입니다.
결론
<Y: 더 라스트 맨> 1~3화를 보고 제가 얻은 건, 위기에 강한 사회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이었습니다. 특정 성별이나 소수의 전문가에게 의존하는 구조는, 그 사람들이 사라지는 순간 통째로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역할과 지식이 고르게 공유되는 사회, 누구든 공백을 메울 수 있는 사회가 실제로는 더 단단합니다.
드라마 자체로 보면, 초반 인물 소개가 다소 복잡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재난 이후의 생존과 함께 성 역할, 권력 승계, 개인의 선택권까지 한 작품 안에서 다루는 시도는 분명히 의미 있습니다. 디즈니플러스에서 스트리밍 중이니, SF 아포칼립스와 정치 드라마를 동시에 즐기고 싶은 분께는 한 번 시작해볼 만한 작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