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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교수가 살인을 계획한 뒤 오히려 삶의 활력을 되찾는다. 영화 <이레셔널 맨>을 처음 봤을 때 이 설정이 불편하면서도 어딘가 낯설지 않았습니다. 저도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내가 하는 일이 아무 의미가 없다고 느꼈던 순간이 있었고, 그때 에이브가 느낀 공허함이 전혀 남 일처럼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살인 계획이 활력이 된다는 설정, 팩트로 따져봤습니다
영화 속 에이브 루카스 교수는 처음 등장할 때부터 지쳐 보입니다. 학생들 사이에선 우울증 소문이 돌고, 절친의 죽음 이후 무기력해졌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는 강의에서 철학의 많은 부분이 "언어적 자위"에 불과하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언어적 자위란, 현실을 바꾸지 못하면서 개념과 논리만 끝없이 반복하는 지적 유희를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이 대사 하나로 그가 얼마나 현실감각을 잃었는지가 드러납니다.
전환점은 이웃 여성의 하소연에서 시작됩니다. 전남편 프랭크가 아이들을 제대로 돌보지 않는데, 담당 판사인 토마스 스팽글러가 프랭크 측 변호사와 친분이 있어 공정한 판결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여성이 "저 판사가 죽었으면 좋겠다"라고 말하자, 에이브는 충동적으로 "내가 대신 죽여줄 수 있다"라고 답합니다. 그 순간부터 그의 내면이 바뀝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실존적 공허(existential vacuum)라는 개념으로 설명하기도 합니다. 실존적 공허란 삶의 목적이나 의미를 상실했을 때 생기는 만성적인 무의미감을 뜻합니다. 오스트리아 정신과 의사 빅터 프랭클은 저서 <죽음의 수용소에서>에서 의미를 잃은 인간이 극단적인 자극을 통해 잠시 살아있음을 확인하려 한다고 지적했습니다(출처: 한국로고테라피연구소). 에이브가 살인 계획을 세운 뒤 밤새 잠 못 이루며 활력을 되찾는 장면은 그 이론의 극단적인 예시처럼 보였습니다.
일반적으로 선한 목표가 있어야 삶에 의미가 생긴다고 알려져 있지만, 이 영화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불편한 가능성을 정면으로 꺼냅니다. 에이브는 스팽글러 판사의 조깅 습관을 파악하고, 독극물 연구를 통해 시안화칼륨을 선택합니다. 시안화칼륨이란 세포의 산소 이용을 차단해 빠르게 치사량에 이르게 하는 무기질 화합물로, 소량으로도 치명적입니다. 그는 컴퓨터 기록을 남기지 않으려 각별히 주의하며 계획을 실행합니다. 그리고 스팽글러 판사는 사망합니다.
에이브는 자신이 논문 대신 행동으로 세상의 "암"을 제거했다고 생각하며 만족감을 느낍니다. 이 지점에서 저는 불편함을 느꼈습니다. 그가 틀렸다는 것이 분명한데, 그 논리가 생각보다 촘촘하게 짜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 에이브는 법적 절차 없이 스스로 판사의 유죄를 결정하고 처형을 집행했습니다
- 그의 판단 근거는 이웃 여성의 하소연 한 번뿐, 객관적 검증은 전혀 없었습니다
- 정의 실현이라는 명분 뒤에는 공허함을 채우려는 자기 욕구가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 이후 무고한 피터 리차드의 아내가 독살 용의자로 체포되며 피해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확산됩니다
어디서부터 시작되는가, 제 경험과 비교해 봤습니다
에이브의 자기 합리화(self-rationalization) 방식이 낯설지 않았던 건 솔직히 예상 밖이었습니다. 자기 합리화란 자신의 행동이 사실은 잘못됐음에도 그럴듯한 이유를 붙여 정당화하는 심리적 방어 기제를 말합니다. 저도 비슷한 패턴을 제 일상에서 발견한 적이 있습니다. 상대를 위한 말이라고 생각해서 충고했는데, 돌아보면 제 기준을 일방적으로 강요한 것이었거나, 결과가 좋을 거라는 이유로 과정의 문제를 가볍게 넘긴 경우가 있었습니다. 작은 합리화가 또 다른 합리화를 불러온다는 걸, 이 영화를 보며 다시 생각하게 됐습니다.
영화에서 질은 에이브에게 존경과 호기심을 느끼며 가까워집니다. 그는 보고서를 훌륭하다고 칭찬하고, 삶의 공허함에 대한 깊은 이야기를 나눕니다. 하지만 질은 서서히 의심을 쌓아갑니다. 에이브가 시안화칼륨을 미리 언급했다는 점, 판사의 주스 마시는 습관을 알고 있었다는 점, 사건 당일 이른 아침 캠퍼스를 떠나는 모습이 목격됐다는 점, 화학 실험실 열쇠가 그의 가방에서 사라졌다는 점까지 하나씩 맞춰지면서 의혹은 확신에 가까워집니다.
인지부조화(cognitive dissonance) 이론에 따르면, 인간은 자신의 믿음과 행동이 충돌할 때 불편함을 느끼고 이를 해소하기 위해 어느 한쪽을 왜곡합니다. 인지부조화란 서로 상충되는 신념이나 태도가 동시에 존재할 때 발생하는 심리적 긴장 상태를 뜻합니다. 미국심리학회(APA) 자료에 따르면 이 기제가 강하게 작동할수록 외부의 비판을 받아들이기 어려워지고 자기 합리화가 심화됩니다(출처: American Psychological Association). 에이브가 무고한 사람이 체포됐을 때 자수 대신 새로운 범죄를 계획하는 장면은 이 이론의 교과서 같은 사례였습니다.
제 경험상 이건 좀 다른 문제처럼 보였습니다. 에이브가 그렇게 행동한 건 단순한 겁쟁이라서가 아니라, 자신의 선택이 여전히 옳다는 믿음을 포기하지 않으려 했기 때문입니다. 살인이라는 행동에 의미를 부여한 순간, 그 의미를 부정하는 것은 곧 자신의 존재 이유를 부정하는 일이 되어버렸을 겁니다. 그래서 그는 질을 엘리베이터로 유인해 또 다른 피해를 계획합니다.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면 그 잘못을 덮기 위한 또 다른 잘못이 뒤따른다는 것, 이 영화가 가장 또렷하게 남긴 메시지였습니다.
제가 직접 이 흐름을 따라가며 느낀 건, 에이브가 특별히 나쁜 인간이 아니라는 점이었습니다. 논리적이고, 공감 능력도 있고, 타인의 고통에 반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이 지점까지 오게 됐는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단순한 범죄 스릴러가 아니라 인간의 자기기만 구조를 해부하는 작품이라고 봤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이레셔널 맨은 어떤 영화인가요? 꼭 봐야 하나요?
A. 우디 앨런 감독, 호아킨 피닉스 주연의 2015년 작품입니다. 철학 교수가 살인을 통해 삶의 의미를 찾으려다 파국을 맞는 이야기인데, 일반적으로 가벼운 로맨스 영화로 소개되는 경우도 있지만 제가 보기엔 자기합리화와 실존적 공허를 다룬 심리 드라마에 가깝습니다. 철학적 주제에 관심 있다면 충분히 볼 만합니다.
Q. 에이브가 살인 후 활력을 되찾는 장면이 현실적으로 가능한가요?
A. 심리학에서는 실존적 공허 상태에 있는 사람이 강렬한 자극이나 목표를 통해 일시적으로 활력을 회복하는 현상이 실제로 보고됩니다. 삶의 의미를 찾으면 반드시 도덕적으로 선한 방향이어야 한다고 알려져 있지만, 빅터 프랭클의 연구에서도 의미 자체의 방향보다 의미의 유무가 더 강하게 심리 상태에 영향을 미친다고 지적합니다. 영화의 설정은 과장이 아닙니다.
Q. 이레셔널 맨 결말이 어떻게 되나요?
A. 에이브는 자신의 범행을 눈치챈 질을 엘리베이터로 유인해 사고사처럼 만들려 합니다. 하지만 계획은 역전되고 에이브 자신이 추락하면서 영화는 끝납니다.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새로운 범죄로 덮으려 한 결과가 자멸로 이어지는 구조로, 이 부분이 영화 전체 주제를 가장 압축적으로 보여줍니다.
Q. 시안화칼륨은 영화에서 왜 등장하나요?
A. 에이브가 판사를 살해하기 위해 선택한 독극물입니다. 시안화칼륨은 소량으로 치명적이고 음식이나 음료에 섞으면 탐지가 어렵다는 점에서 범죄 소재로 자주 등장합니다. 영화에서는 에이브가 판사의 주스 마시는 습관을 파악하고 이를 이용합니다. 이 물질에 대한 언급이 나중에 질의 의심을 결정적으로 확인시키는 장치로도 작동합니다.
결론
이레셔널 맨을 다 보고 나서 제가 가장 오래 붙들고 있었던 질문은 "나는 내 선택에 얼마나 정직한가"였습니다. 에이브는 지식인이고, 공감 능력도 있으며, 처음엔 불의에 분노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그가 파국을 맞은 건 자신의 행동에 계속해서 의미를 덧씌웠기 때문입니다. 삶의 의미는 극적인 행동에서 오는 게 아니라, 내 선택이 타인에게 미칠 영향을 고민하고 잘못했을 때 책임지는 태도 속에서 만들어진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영화 제목 그대로, 인간은 스스로를 이성적이라고 믿지만 실제로는 욕망을 먼저 선택한 뒤 그 행동에 논리를 붙이는 비이성적인 존재일 수 있습니다. 이 영화가 불편했던 이유는 에이브가 나쁜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그 논리의 구조가 일상에서도 작동하고 있다는 걸 알았기 때문입니다. 철학 영화나 심리 드라마에 관심 있다면, 이 작품을 한 번 보고 본인의 자기합리화 패턴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져보시길 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