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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 모든 사람이 단 하룻밤 사이에 사라졌다. 영화 <보케>는 그 황량한 전제 위에서 생존이 아닌 전혀 다른 질문을 던진다. 저는 이 영화를 보면서 한동안 떨쳐내지 못했던 어떤 감각이 떠올랐습니다. 앞으로 무엇을 위해 살아가야 하는지 답을 찾으려다 오히려 지금 이 순간을 통째로 흘려보냈던 그 시절이요.
사라진 세상에서 무너지는 것은 몸이 아니라 의미였다
일반적으로 종말 이후를 다룬 영화라고 하면 식량 확보, 안전한 거처 마련, 외부의 위협 같은 생존 서사를 먼저 떠올리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제가 직접 이 영화를 봤을 때 느낀 건 전혀 달랐습니다. <보케>에서 커플 알리와 제나는 아이슬란드 여행 중 오로라 현상을 목격한 다음 날 아침, 자신들을 제외한 모든 사람이 사라진 세계에 남겨집니다. 식량은 충분하고, 도시는 멀쩡하고, 거처도 마련됩니다. 물리적으로 이들은 전혀 위협받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제나는 조금씩 무너집니다. 저는 이 부분이 이 영화의 핵심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실존적 공허(Existential Vacuum)라는 개념으로 설명합니다. 실존적 공허란 삶의 의미와 목적을 잃었을 때 찾아오는 내면의 공백 상태를 가리키는데, 오스트리아 정신과 의사 빅터 프랭클이 그의 저서에서 체계화한 개념입니다. 제나가 겪는 것이 정확히 이것이었습니다. 먹고 자고 숨 쉬는 일은 가능하지만,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를 알 수 없는 상태.
저 역시 비슷한 감각을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고 미래가 불확실하게 느껴질 때, 분명 평범한 하루가 이어지고 있는데도 확실한 목표가 보이지 않으면 제자리걸음을 하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 자기 방향을 알고 살아가는 것 같아 이유 모를 조급함이 들기도 했고요. 제나의 불안은 저에게 낯설지 않았습니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장면이 하나 있습니다. 두 사람이 버려진 비행기 앞에 서 있을 때, 라일리는 그것을 아름답다고 말하고 제나는 단절과 죽음을 떠올립니다. 같은 사물 앞에서 완전히 다른 정동(Affect)이 촉발되는 장면이었습니다. 정동이란 외부 자극이 내면에 일으키는 즉각적인 감정 반응을 뜻하는데, 이 장면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처한 내면의 상태를 통해 본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보여줬습니다.
영화는 결국 제나가 세상을 떠나는 것으로 마무리됩니다.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희망과 절망이 반복되는 흐름 속에서 어딘가에서 반전이 있을 거라 기대했는데, 영화는 그 기대를 조용히 거절했습니다. 정신건강 분야 연구들은 사회적 연결과 소속감이 인간의 심리적 안녕(Psychological Well-being)에 필수적임을 반복해서 지적합니다. 쉽게 말해 인간은 혼자서 '의미'를 만들어내기 매우 어렵다는 뜻입니다(출처: WHO 정신건강 팩트시트). 제나의 결말은 그 사실을 가장 극단적인 방식으로 증명했습니다.
- 실존적 공허(Existential Vacuum): 삶의 의미를 잃었을 때 찾아오는 내면의 공백으로, 제나의 붕괴를 이해하는 핵심 개념
- 정동(Affect): 동일한 외부 자극에도 내면 상태에 따라 전혀 다른 감정 반응이 촉발됨을 버려진 비행기 장면이 보여줌
- 심리적 안녕(Psychological Well-being): 신체적 생존과 별개로, 사회적 연결과 소속감이 유지되어야만 가능한 상태
라일리의 태도는 정답이었을까, 아니면 또 다른 한계였을까
일반적으로 현재에 집중하는 태도는 긍정적으로 평가받습니다. 마음 챙김(Mindfulness) 기반 치료나 수용전념치료(ACT, Acceptance and Commitment Therapy) 같은 현대 심리치료들이 공통적으로 강조하는 것도 '지금 이 순간에 머무는 능력'이니까요. 수용전념치료란 통제할 수 없는 생각과 감정을 억압하지 않고 수용하면서 자신이 가치를 두는 행동에 전념하도록 돕는 심리치료 방식입니다. 라일리의 방식은 표면적으로 이 개념과 닮아 있습니다.
그런데 제 경험상 이건 좀 다릅니다. 현재에 집중하는 것과 상대의 고통에 충분히 머무는 것은 별개의 일입니다. 라일리는 원인을 알 수 없는 현실을 빠르게 수용하고 앞으로 나아가지만, 제나가 왜 그렇게 하지 못하는지에 대해서는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함께 있다는 것과 함께 느낀다는 것은 다른 문제이고, 영화는 그 간극을 꽤 세밀하게 포착했습니다.
저도 가까운 사람이 힘들어할 때 제가 생각하는 해결책이나 희망을 먼저 건넨 적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 입장에서는 위로가 아니라 자신의 감정이 부정당하는 느낌이었을 수도 있겠다는 걸, 이 영화를 보고 나서야 더 선명하게 이해했습니다. 공감(Empathy)이란 단순히 옆에 있어 주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느끼는 절망을 자신의 것처럼 받아들이려는 능동적인 시도입니다(출처: American Psychological Association). 라일리에게 그 시도가 충분했는지, 영화를 다 보고 나서도 저는 확신하기 어려웠습니다.
다만 라일리를 비판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도 같은 상황에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버텨내고 있었고, 제나를 걱정하며 찾아갔습니다. 결국 그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 사이에서 최선을 다한 셈입니다. 이 영화가 불편하게 남는 이유는 누군가의 잘못을 지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같은 상실 앞에서 두 사람이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무너지거나 버텼고, 그 차이가 결말을 갈랐습니다.
영화의 배경인 아이슬란드의 텅 빈 풍경이 그 분위기를 증폭시켰습니다. 제가 직접 이 영상을 봤을 때, 드넓은 설원과 아무도 없는 도시의 이미지가 자유로움과 고립감을 동시에 전달하는 방식이 꽤 정교하다고 느꼈습니다. 아름다운 것이 동시에 두려운 것이 될 수 있다는 걸, 이 영화의 공간은 말없이 보여줍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영화 보케, 결말이 너무 우울한 거 아닌가요?
A. 저도 처음엔 그렇게 느꼈습니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이 영화는 처음부터 위로나 희망을 약속한 적이 없었습니다. 제나의 결말은 충격적이지만, 그게 이 영화가 던지는 질문의 무게를 고스란히 전달하는 방식이기도 합니다. 불편하게 끝나는 영화가 오히려 더 오래 남는 경우가 있는데, 보케가 그런 작품이었습니다.
Q. 보케에서 사람들이 사라진 이유가 결국 뭔가요?
A. 영화는 끝까지 명확한 설명을 주지 않습니다. 일반적으로 SF 장르라면 원인 규명을 기대하기 마련인데, 보케는 그 기대를 의도적으로 배반합니다. 저는 이 불친절함 자체가 정답 없는 삶과 닮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유를 알 수 없어도 살아가야 하는 상황을 두 인물이 어떻게 받아들이느냐가 진짜 주제이기 때문입니다.
Q. 보케는 어떤 분들에게 추천할 만한 영화인가요?
A. 빠른 전개나 강렬한 사건보다 인물의 내면 변화에 집중하는 분들에게 잘 맞는 작품이라고 봅니다. 제 경험상 삶의 방향이나 의미에 대해 고민해본 적 있는 분들이라면 제나나 라일리 중 한 사람의 시선에 깊이 공명하게 됩니다. 다만 전개가 느리고 감정적으로 무거운 편이라 가볍게 보기엔 부담스러울 수 있습니다.
Q. 삶의 의미를 못 찾겠을 때 어떻게 해야 하나요?
A. 저도 그런 시기가 있었는데, 돌이켜보면 그 시기를 버텨낸 건 거창한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좋아하는 일을 하고, 가까운 사람과 대화하고, 하루를 무사히 마치는 작은 순간들이었습니다. 지금 당장 이유를 찾지 못하더라도 오늘을 살아내는 것 자체가 하나의 의미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제게는 위안이 됐습니다.
결론
<보케>는 삶에 반드시 거대한 목적이 있어야 하는지를 조용히 묻는 영화입니다. 제가 이 영화를 보고 가장 오래 남은 생각은 하나였습니다. 같은 고통을 겪는 사람이라도 그것을 견디는 방식은 완전히 다를 수 있고, 그 차이를 이해하지 못한 채 건네는 위로는 때로 위로가 되지 못한다는 것.
전개가 느리고 답을 주지 않는 방식이 답답하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 불친절함이 이 영화를 더 정직하게 만든다고 봅니다. 삶도 대부분 그렇게 작동하니까요. 이 영화에 관심이 생긴다면 두 인물 중 자신이 어느 쪽에 더 가깝게 느껴지는지 생각하면서 보시면 훨씬 더 깊이 들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