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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이 사람을 살릴 수 있을까요. 영화 <누룩>은 바로 그 질문에서 시작합니다. 18세 소녀 다슬이 막걸리를 '약'으로 믿으며 살아가는 이야기인데, 저는 이 영화를 보는 내내 다슬의 집착이 낯설기보다 어딘가 익숙하게 느껴졌습니다. 버티기 위해 무언가를 붙잡아야 했던 제 시간들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막걸리가 약이 된다면, 그게 집착일까요 믿음일까요
다슬은 학교에 화장품 공병을 가지고 다닙니다. 그 안에는 막걸리가 들어 있습니다. 성적도 좋고 친구들과도 잘 지내는 평범한 고등학생이, 가족 몰래 술을 챙겨 다니는 이 장면이 영화의 첫 번째 균열입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개념이 심리적 의존(Psychological Dependence)입니다. 심리적 의존이란 특정 물질이나 행동이 없으면 불안이나 공허감이 심해져 일상 유지가 어려워지는 상태를 말합니다. 다슬에게 막걸리는 단순한 기호식품이 아니라, 그것이 없으면 무너질 것 같은 심리적 버팀목이었던 것입니다.
저도 몸과 마음이 바닥일 때 특정 음식이나 콘텐츠에 지나치게 기댔던 기억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작은 위로였는데, 어느 순간 그게 없으면 하루를 시작하기가 불안해지더군요. 그 감각이 다슬의 모습과 겹쳐 보였습니다.
다슬의 아버지는 막걸리를 전통 발효식품이자 민간 치료제처럼 여깁니다. 실제로 발효 과정에서 생성되는 유산균과 효소가 건강에 긍정적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연구는 존재합니다. 그러나 알코올의존증(Alcohol Use Disorder)은 세계보건기구(WHO)가 공식 질환으로 분류하는 상태로, 음주 조절 능력이 손상되고 신체·정신 기능이 저하되는 심각한 문제입니다. 아버지의 태평함이 마냥 순진한 믿음처럼 보이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출처: WHO 알코올 팩트시트).
- 다슬의 막걸리 집착은 심리적 의존의 전형적인 패턴을 보입니다
- 아버지의 '약'이라는 믿음은 검증되지 않은 민간 신념에 가깝습니다
- WHO는 알코올의존증을 치료가 필요한 공식 질환으로 규정합니다
- 미성년자의 음주를 신비한 치유로 낭만화하지 않도록 주의가 필요합니다
걱정이 잔소리가 되는 순간, 가족은 왜 멀어질까요
오빠는 다슬이 알코올 중독에 빠질 것을 두려워합니다. 그 두려움은 충분히 이해됩니다. 그런데 그 두려움이 막는 행동으로만 표출될 때, 다슬은 오빠를 향해 마음의 문을 닫습니다. 저도 비슷한 경험이 있었습니다. 가족이 걱정해서 하는 말을 그 당시에는 간섭으로 받아들였는데, 나중에 돌아보니 그 말 안에 불안과 애정이 뒤섞여 있었더군요.
반면 아버지는 누룩으로 빚은 막걸리가 다슬을 지탱해 준다고 믿습니다. 여기서 누룩이란 밀이나 쌀 등의 곡물에 자연 미생물을 번식시켜 만든 발효 스타터를 말합니다. 쉽게 말해 막걸리를 빚는 데 반드시 필요한 발효의 씨앗 같은 것입니다. 아버지가 양조장을 인수할 때 빚을 지면서까지 '이 누룩으로 막걸리를 빚는 것'을 조건으로 내걸었다는 설정이 예사롭지 않게 느껴졌습니다.
오빠와 아버지, 두 사람 모두 다슬을 사랑하지만 서로 정반대의 방향을 바라봅니다. 한쪽은 막아야 한다고 하고, 다른 쪽은 괜찮다고 합니다. 그 사이에서 다슬이 받는 혼란이 가족 갈등의 핵심입니다. 제 경험상 이런 구조에서는 정작 당사자가 가장 고립되기 쉽습니다. 다슬에게 필요했던 것은 막걸리를 빼앗는 일도, 기적을 그대로 믿어주는 일도 아니었을 것입니다. 왜 그것에 집착하게 됐는지를 함께 살피는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가족 내 정신건강 문제를 다룰 때 효과적인 접근으로 자주 언급되는 것이 동기강화상담(Motivational Interviewing)입니다. 동기강화상담이란 당사자 스스로 변화의 이유를 찾을 수 있도록 비판단적 대화를 통해 내면의 동기를 이끌어내는 상담 기법입니다. 무조건 막거나 무조건 수용하는 양극단 대신, 이런 접근이 실제 치료 현장에서도 훨씬 효과적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출처: 미국 국립알코올남용및중독연구소 NIAAA).
누룩이 사라졌을 때 무너진 건 몸이 아니라 믿음이었습니다
영화 후반부에서 양조장의 누룩이 사라집니다. 그러자 다슬이 빚은 막걸리 맛이 변하고, 다슬은 환청과 환각을 경험하며 급격히 무너집니다. 수업 도중 쓰러진 다슬이 누룩을 찾아야만 살 수 있다고 절규하는 장면은 이 영화에서 가장 강렬한 순간입니다.
이 장면을 보면서 저는 플라세보 효과(Placebo Effect)를 먼저 떠올렸습니다. 플라세보 효과란 실제 치료 성분이 없는 물질이나 행위라도 당사자가 효과가 있다고 강하게 믿으면 실제로 신체 반응이 나타나는 현상을 말합니다. 반대로, 그 믿음의 대상이 사라지면 신체가 실제로 이상 반응을 보이는 노시보 효과(Nocebo Effect)도 의학계에서 인정되는 현상입니다. 다슬의 붕괴가 단순한 과장이 아니라 믿음 시스템이 무너질 때 인간에게 일어날 수 있는 실제 반응처럼 읽혔던 이유입니다.
솔직히 이 부분은 예상 밖이었습니다. 성장 드라마로 시작한 영화가 미스터리 스릴러에 가까운 밀도로 전환되는 속도가 꽤 가팔랐습니다. 다슬이 대형 양조장에 침입해 누룩을 훔쳐오는 장면은 극적 긴장감은 높지만, 그 선택에 이르기까지의 내면 설명이 조금 더 있었다면 설득력이 더 강해졌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그럼에도 전통 발효 문화를 미스터리 서사와 결합한 시도는 독창적이었습니다. 특히 장동윤 감독의 데뷔작이라는 점에서, 팬데믹 시기 치유와 공동체를 둘러싼 질문을 이렇게 한국적인 소재로 풀어냈다는 것이 인상 깊었습니다. 치유란 기적의 물질 하나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고통의 이유를 이해하고 곁을 지키는 관계에서 시작된다는 메시지는, 영화가 끝나고도 한참 머릿속에 남았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영화 누룩은 실화를 바탕으로 한 건가요?
A. 실화 기반은 아닙니다. 장동윤 감독이 팬데믹 시기 막걸리가 병을 낫게 한다는 발상에서 출발한 창작 이야기입니다. 다만 인간이 극한의 상황에서 특정 믿음에 의존하는 심리는 현실에서도 충분히 관찰되는 현상이라, 픽션이지만 낯설지 않게 느껴집니다.
Q. 다슬의 막걸리 집착이 알코올중독인가요, 아닌가요?
A. 영화는 이 경계를 의도적으로 흐립니다. WHO 기준으로 알코올의존증을 판단하려면 음주 조절 실패, 내성, 금단 증상 등 복합적 기준이 필요합니다. 다슬의 경우 그 기준을 명확히 충족한다기보다, 믿음 자체가 신체 반응을 만들어내는 심리적 의존에 더 가깝게 묘사됩니다.
Q. 누룩이 실제로 건강에 좋은 건가요?
A. 누룩은 발효 과정에서 유산균, 효소, 유기산 등을 만들어내는 전통 발효 스타터로, 소화 기능에 긍정적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연구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 효능이 알코올 섭취의 위험을 상쇄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특히 미성년자에게는 어떤 형태의 음주도 권장되지 않습니다.
Q. 장동윤 감독 데뷔작이라고 하는데, 연출 스타일이 어떤가요?
A. 제가 직접 영화를 보면서 느낀 것은 전반부와 후반부의 톤 전환이 꽤 과감하다는 점입니다. 조용한 성장 드라마처럼 시작해서 미스터리와 긴장감이 고조되는 구조인데, 데뷔작으로서는 장르적 도전 의식이 눈에 띄었습니다.
결론
영화 <누룩>을 보고 나서 제가 가장 오래 생각한 것은 다슬이 아니라 오빠였습니다. 걱정이 맞아도 방식이 틀리면 상대에게 닿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옳은 말도 관계가 닫혀 있으면 소음이 된다는 것을 오빠의 모습에서 다시 한번 확인했기 때문입니다.
이 영화가 던지는 질문은 단순히 막걸리가 약이냐 아니냐가 아닙니다. 누군가의 이상해 보이는 행동 뒤에 어떤 두려움과 간절함이 있는지를 먼저 바라볼 수 있느냐, 그것이 핵심입니다. 정리하면, 치유는 믿음에서 시작되지만 그 믿음이 현실적 도움을 대신하게 될 때 위험해집니다. <누룩>은 그 경계를 한국 전통 발효 문화라는 소재로 풀어낸 작품으로, 장르 영화를 좋아하면서 동시에 사람 이야기가 궁금한 분들께 추천하고 싶습니다.